디자인사학회 뉴스레터 6호 - 이윤아 인터뷰
디자인사학회 뉴스레터 6호 이윤아 Interview
편집: 디자인사학회
인터뷰:이윤아
진행: 문희채
발행: 2024년 1월 15일
Q. 영국에서 디자인사를 가르치고 계신데요, 영국의 디자인사 연구 현황에 대해 알려주세요.
A. 영국에서는 디자인사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쯤 떠오르는 학문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그때 미술사나 건축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독립된 장르로서 디자인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영국의 디자인사 학계에서 관심있는 주제로 2015년 정도부터 떠올랐던 ‘탈식민주의(decolonization)’가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 중심 역사가 아니라 글로벌한 세계사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왜 영국의 식민지배와 관련된 아시아나 흑인에 관한 역사가 없는가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영국의 디자인사학회(Design History Society, DHS)에서도 다양한 국가의 디자인사 연구를 다뤘습니다. 연구대상이 지역적으로 넓혀진 거죠. 식민 지배의 결과로 나타난 불평등함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역사적 착취와 훼손을 어떻게 회복시켜줄 것인가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여기에 행동주의(activism)가 나타나면서 역사적으로 배운 결과를 미래를 위해 어떻게 현재에 응용하고 적용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한동안 많이 일어났습니다. 요즘에는 처음에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유되는 경우가 많아서 탈식민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사람도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은 경계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근래에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연구 범위를 좁게 들어갈 수 있어서 정치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면서 교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용어로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또한 영국에서는 최근 난민과 이민자, 교포들의 삶에 관한 관심이 많아지며 보더(border)와 거기에서 나오는 충돌의 문제를 많이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보더는 경계를 뜻할 뿐 아니라 학문 분과 간의 다학제적인 흐름을 포함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물질문화(material culture)에 관한 관심도 많이 높아졌습니다 물질적 변환의 시기라고 부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역사학, 사회학, 철학에서도 물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이게 지속되다 보니 2010년대 이후에는 디자인사 학계에서 위기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자인사 고유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역사학이나 사회학에서도 다뤄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디자인사의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다양한 학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어떻게 하면 디자인사 고유의 학문 분과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학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연구하는 대상도 바뀌고 방법론도 바뀝니다. 영국의 디자인사 학계에서는 2000년 이후부터 정체성에 대한 여러가지 고민들이 지속되는 것이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DHS에서는 이런 다양한 양상들이 나타나는데, 연구에 대한 지원도 다양합니다. 영어권이 아닌 나라에서 디자인사를 하는 사람들은 번역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은 저를 비롯한 비영권출신의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건의한 안건입니다. 디자인사 연구 대상 지역이 넓어졌지만,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결국 논문이 영문으로 나와야 하기 때문에 비영권 지역에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은 번역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다양한 지역을 연구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물이 영국에 관한 연구와 동등해지기 어렵습니다. 번역에 대한 지원은 연구 대상 국가에서도 있어야 하겠지만, 영어를 통해 전체적인 디자인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기에 DHS에서는 발간하는 학술지에 1년에 한 번씩 논문 번역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Q. 영국 대학 학제에서 디자인사의 위상에 대해 궁금합니다. 디자인사가 하나의 전공 과목으로 인정이 되나요?
A. 영어로 정기적으로 디자인사 관련 학술대회를 여는 곳은 DHS(Design History Society)와 ICDHS(International Conferences on Design History and Studies)입니다. 1999년부터 시작해 거의 2년마다 열리는 ICDHS 학술대회는 DHS에 비해 좀 더 글로벌한 참여를 유도해 300-400명 규모입니다. 해마다 학술대회를 열며 정기적으로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는 DHS에는 150-200명 정도 참여합니다. 하지만 이걸 미술사 관련 학회와 비교해 보면 아주 작은 규모입니다. 영국에서도 디자인사가 주류의 학문은 아닙니다.
대학의 학부 과정에 디자인사를 전공 과목으로 개설한 곳은 브라이턴 대학이 유일합니다.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배운 걸 토대로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학부 과정에서의 디자인사는 낯선 전공입니다. 최근에는 디자인사 학과 뿐만 아니라 미술사도 학생이 많이 줄어 전공 과목이 문을 닫는 곳이 많이 생기고 있어 전공 유지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대학원 과정에서 디자인사를 전공으로 내세우는 곳은 브라이턴과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두 곳입니다. 특히 브라이턴은 미술관과 연계해서 디자인사 박사과정에 정부 펀딩을 많이 따는 등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두 학교를 제외한 다른 학교는 대부분 역사학과나 인류학과, 미술사학과 등에서 디자인을 연구대상으로 다루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디자인 실기를 하면서 역사적인 접근법을 이용해서 논문을 쓰는 경우는 실기 교수님과 디자인사 교수가 공동지도를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영국에서도 디자인사는 소수의 학문인 것이 사실입니다. 영국이 한국보다 상황이 좋은 점은 학부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디자인사와 비평을 필수과목으로 듣게 한다는 점입니다. 학부에서 이렇게 디자인사를 반드시 교육시키는 점이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가끔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이 학부 과정으로 다시 오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디자인사와 비평을 배운 적이 없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디자인사가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대학교 학부에서 디자인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선생님이 가르쳐야 합니다. 한국에서 학부에 디자인사 전공을 만드는 것은 무리겠지만, 대학원 과정에서 디자인사를 전공하고 디자인 학부에서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 수요가 많아야 디자인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학제 안에서 디자인사를 키울 수 있는 방법들은 디자인사학회의 로비가 필요한 일입니다. 각 학부마다 디자인사가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학부 교육 안에 커리큘럼 안에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합니다.
Q. 한국의 디자인사 연구를 위해 제언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지금까지 한국디자인사학회의 연구 중심이 ‘한국’에 관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제는 ‘디자인사’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디자인에만 관심이 있는데, 디자인사라는 영역은 넓습니다. 디자인사 연구를 16세기나 18세기에 만들어진 도구에 관한 연구까지도 아우르기 위해서는 한국에 중점을 뒀던 것을 디자인사로 바꿔야 합니다. 다양한 지역의 디자인 문화와 역사로 관심을 다양하게 넓혀야 합니다. 이 속에서 디자인의 역사적 맥락이 어떻게 논의될 수 있는가를 다룰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의 디자인사를 다시 정립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