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사학회 뉴스레터 20호 - 일상의실천 Archive Footnotes
디자인사학회 뉴스레터 20호 - 일상의실천 Archive Footnotes
편집: 디자인사학회
인터뷰: 일상의실천
진행: 홍주희
발행: 2025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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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작가주의적 아카이브 작업 방식을 조명합니다. 이번 주제는 ‘공동체와 사회’로 일상의실천 권준호 디자이너님의 《시대 정신》 아카이브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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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시국 선언문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자발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저도 다른 분들처럼 12월 3일 뉴스를 보다가 속보를 접했습니다. 처음엔 장난인 줄 알았는데, 실시간으로 상황이 심각해지는 걸 보면서 당황스러웠어요. 저는 민주화운동 세대는 아니지만, 대학 시절부터 민주주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어요. 졸업 전시도 그 주제로 작업했고, 광주에 내려가 유족분들을 인터뷰하며 민주화운동을 공부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런 장면들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것이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비상계엄이 선포됐다가 해제되는 과정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을 거예요. 저도 거리로 나가야 하나 고민했고, 실제로 거리에서 맞서 싸운 분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요. 만약 시민들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군이 그대로 밀어붙였을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니까, 군 내부에서도 “이게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1차 탄핵 소추안이 부결됐을 때,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없는 일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그러면서 시민들이 직접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선언문들이 계속 발표되는 것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어요. 민주주의 가치를 강조하는 글도 있었고,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도 있었죠.
특히 제가 포스터 작업을 했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선언문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를 살펴보면서, 이 단체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 당시에도 성명서를 발표했고, 더 거슬러 올라가 보니 박정희 정권 시절까지도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국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마다 이런 선언문들이 등장했더라고요. 선언문은 누군가의 지시로 쓰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행위잖아요. 그 의미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직접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동안 제가 찾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자료를 모았어요. 마침 협업하던 기자분들(비즈한국의 봉성창, 전다현)도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계셔서 함께 아카이빙을 시작했고요. 결국 250여 개의 선언문을 모았고, 이를 통해 단순히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 연대의 힘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보통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려면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대 정신’을 가장 잘 담아낸 문장을 선정해, 제가 알고 있는 디자이너들을 중심으로 연락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라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거절하신 분들도 있었고,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참여가 어렵다는 분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뜻을 함께하는 많은 분들이 선뜻 참여해 주셨고, 최종적으로 약 63팀의 디자이너가 함께하면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Q2. 1960년부터 2024년까지의 시국 선언문과 디자이너들이 작업한 선언문 포스터를 함께 아카이빙하며,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A. 디자이너의 포스터가 선언문의 핵심 내용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지만, 저는 선언문 전문을 직접 읽어보는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선언문의 문장을 깊이 이해하고 곱씹어볼 기회가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특히 선언문을 읽다 보면,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현 정권을 비판하는 문장들이 닮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날짜를 가리고 보면 이 문장이 2024년의 것인지, 2009년의 것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죠.
결국, 시대가 바뀌었지만, 시민들이 반복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어요. 선언문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싸움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 맥락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Q3. 포스터를 아카이브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포스터는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가장 익숙한 도구이자, 대중에게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포스터는 프로파간다와 사회운동의 핵심 도구로 활용되며 메시지를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해왔죠.
또한, 저는 문장이 가지는 힘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선언문의 문장을 조형물로 만들 수도 있고, 디지털 매체에서 구현할 수도 있지만, 디자이너로서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포스터 작업은 기본적인 표현 방식이자 출발점이 되어 왔어요.
포스터가 실제로 인쇄되지 않더라도 하나의 시각적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의 작업 방향을 잡는 기준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결국, 포스터는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라고 판단했습니다.
Q4. 이번 아카이빙 프로젝트를 웹사이트와 전시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풀어내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각 방식이 갖는 의미와 차별점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저희 스튜디오는 웹과 그래픽 디자인을 중심으로 작업하는데, 최근 이 두 매체의 특징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느낍니다. 과거에는 포스터를 대량 인쇄하거나 책을 만들어 정보를 배포했다면, 이제는 SNS나 웹사이트를 통해 정보를 빠르게 확산하는 시대가 되었죠.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웹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선언문의 접근성을 높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빠르게 공유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인쇄물이 의미를 잃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실크스크린 같은 수작업 인쇄 방식은 디지털 매체로 대체할 수 없는 촉감과 물성을 지니고 있어요. 전시는 이런 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하며, 선언문의 물리적 존재감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웹사이트는 선언문을 기록하고 확산하는 역할을, 전시는 선언문의 텍스처를 직접 보는 경험을 통해 기억을 환기하는 역할을 합니다. 두 가지 방식이 함께할 때, 선언문 아카이브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경험될 수 있는 기억의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Q5. 디자이너로서 공동체와 사회를 기록하는 의미는 무엇이며, 민주주의 역사에서 디자인 아카이브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디자이너가 일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쉽지는 않잖아요. 대부분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다 보니, 개인적인 신념이나 사회적 이슈를 적극적으로 다룰 기회가 많지 않죠. 하지만 디자이너는 단순히 주어진 작업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향성과 가치관을 명확히 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체성은 포트폴리오를 통해 자연스럽게 쌓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며 만들어지죠. 이런 작업들이 쌓일수록, 디자이너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디자이너의 역할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단순히 포스터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이슈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디자인 아카이브는 단순히 기록을 모아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기획하고 어떤 흐름으로 큐레이션 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이번 프로젝트 역시 선언문을 단순히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민하며 구성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예를 들어 30년 후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를 다시 본다면, 이 시대의 디자이너들이 사회적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연대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이것이야말로 디자인 아카이브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사회적 움직임을 기록하는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