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사학회 뉴스레터 26호 - 박고은 Archive Footnotes
편집: 디자인사학회
인터뷰: 박고은
진행: 홍주희
발행: 2025년 9월 15일
Q1. 사라진 근대 건축물, 유실된 사운드, 대안공간의 흔적 등, 주로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을 아카이빙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현대 서울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근대 건축물의 빈자리를 조명하는 단행본 『사라진 근대건축』은 제가 석사 졸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수집한 시각 재료들을 엮어 출간한 책입니다. 오래전부터 근대건축에 관심이 있어 여가 시간이 생기면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들을 틈틈이 방문하곤 했지만, 이를 디자인 작업으로 연결 지어 본격적으로 자료를 수집한 것은 석사 졸업 연구가 첫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요 관공서 건물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록을 남기지 않고 철거돼 사라진 공간이었기에, 작업의 첫 단계에서 ‘무엇을 아카이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겪은 시행착오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작업 과정에서 제가 찾은 대다수의 자료는 증명사진처럼 또렷하고 선명한 건물의 모습이 아니라, 사진 속 배경 저 멀리에 흐릿하게, 그마저도 전체 모습이 아닌 절반만 겨우 찍힌 모습이었거든요. 1930~196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촬영된 흑백 영화 속 배경에 슬쩍 걸친 건물, 소설 속 주인공이 묘사하는 건물의 내외부 모습, 신문 기사 속 건물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사고에 관한 단편적인 글, 공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긴 증언 기록 등, 아카이브 재료라기에는 부족한 작은 파편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재료를 통해 제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사라진 장소의 빈자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얼마 남지 않은 조각 정보를 흥미로워 보이도록 나열하며, 이를 보는 사람들이 어렴풋이나마 그 형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단행본에는 기록 정보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건물을 위주로 실었기에, 수집 단계에서 제가 흥미를 느꼈던 시각 자료들은 많이 빠졌지만, 이 작업을 계기로 ‘사라진 것’들을 디자인 작업의 소재로 삼게 되었습니다.
출간 후 근대건축을 연구하는 분들을 간혹 뵐 때면, 사실상 연구 자료로는 가치가 없어 보이는 자료들을 디자이너의 시각에서 재편집해 건축 연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점이 인상 깊었다는 감상을 전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저의 관점에서는 사라진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정확하게 그려진 건물 도면 이미지보다는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주인공의 어깨 뒤로 비치는 흐릿한 건물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더 강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접근법을 다른 ‘사라진’ 소재에도 적용하며 실험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Q2. <글자를 입은 소리들이 모인 지도>는 단순히 정보의 복원이 아니라, 기억의 층위를 다시 엮는 과정처럼 보이는데요, 어떤 기준에 의해 아카이빙한 정보를 재맥락화하였나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기획 전시의 창제작인 <글자를 입은 소리들이 모인 지도>는 광주광역시 지역 내 ‘사라지거나 잊힌 땅 이름’을 수집하고, 디지털 지도 위에 복원하는 인터랙티브 작업입니다. 우연히 한글학회에서 발행한 『한국지명총람』을 알게 되었는데,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한글 지명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흥미를 끌었습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기록 문자로는 한자가 주로 쓰였기 때문에, 실제 사람들이 말소리로 부르던 땅 이름이 훈차(訓借), 음차(音借) 또는 훈음차(訓音借) 방식으로 표기되면서 때로는 본래 의미와 전혀 다른 형태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지명총람 책 속에서 발견한 낯선 글자와 소리로 이루어진 땅 이름들을 지도 위에 펼쳐놓고, 관람객의 동작에 따라 스크린 속 지도가 반응하며 길을 거닐 수 있는 미디어 작업을 완성하였습니다.
특히 한글로 된 옛 고유 지명은 장소를 특정하는데 산과 강, 들, 물줄기, 돌, 나무, 동물의 형상 등 자연물과 방위를 나타내는 동서남북, 안과 밖, 위와 아래가 대체로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단순 정보가 아닌 이미지로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지도를 사라진 지명의 기원이 되는 자연적 요소로 환원하여 새로이 매핑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관람객이 궁금한 지명에 해당하는 버튼을 활성화하면 스크린 속 지도의 중심 좌표가 해당 장소로 이동하며 주변을 둘러싼 자연 지형들을 함께 관찰하고 땅 이름을 유추해 볼 수 있도록 의도하였어요. 제가 수집한 정보를 덜 친절한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가 스스로 발견한 조각 정보들을 엮어볼 수 있는 여지를 비워두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집한 정보를 책이라는 매체로 보여줄 때와 전시의 형식을 빌려 전달할 때, 맥락을 엮는 방식을 각각 다르게 실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Q3. <글자를 입은 소리들이 모인 지도>나 <SISI; 始澌>과 같은 작업을 전시로 구현할 때, 기록의 특성을 어떻게 공간 속에 배치하고 관람객이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전시장에 놓을 때 고민하는 지점이 단순한 정보의 전달 이상의 인상적인 경험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입니다. 제가 펼쳐놓은 재료들이 정보 그 자체라면 미술 전시장이 아닌 박물관에 놓이는 것이 훨씬 맥락이 맞으니까요. 고민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찾아가는 과정이지만, 앞서 말했듯이 제가 모은 정보들을 오히려 작업의 표면에서 숨기는 방식을 계속해서 실험해 보고 있습니다. 관람하는 누군가의 관점에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왜인지 눈길이 가는 어떤 대상(글자, 단어, 사진, 그림 한 조각)을 기억에 담아 다른 곳에서 발견한 어떤 대상과 연결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예를 들어, 2000년대 이후 국내에 생기기 시작한 대안공간들을 아카이브 한 전시 작업인 <SISI; 始澌>는 그 공간들의 평균 운영 기간이 2~3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일차적으로 2000~2023년까지 현존하거나 조용히 사라진 대안/신생 전시 공간들에 대한 정보들을 모았어요. 그중 제 관점에서 재미있는 재료는 각 공간에서 열린 지난 전시 제목의 모음이었습니다. 공간별로 모은 전시명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길지 않은 생애 주기 그래프처럼 보였거든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서도, 한 공간이 탄생하고 폭발적으로 활성화되는 시기를 거쳐 사그라지는 형상들을 모아서 보니 2000년 이후로 23년에 이르기까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막대그래프가 그려졌어요. 저와 전시 기획자 두 분과 모은 데이터이기에 한국 대안/신생 공간에 대한 완전한 아카이브라고는 절대 볼 수 없지만, 방문한 관람객분들은 타임라인을 종횡하는 그래프를 보며, 오래전 본인이 관람한 전시와 공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누락된 공간 정보를 제공해 그래프를 더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도 했습니다.
Q4. 디자이너님에게 ‘기록한다는 것’과 ‘표현한다는 것’은 어떤 태도이자 실천인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게 ‘기록하는 것’은 평소 관심 있던 대상에 대한 앎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일정 기간 대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그것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관점을 정립하는 단계이기도 하고요. 관찰·수집·기록이라는 어떻게 보면 지루한 시간을 거치며 그것들을 엮는 방식을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아카이브의 성격을 띠는 작업 특성상 정보를 중립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지 않아야 전시 작업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 보니 제 작업의 과정에서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버리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은 정보들을 추리고 재배열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것의 ⅔ 이상은 결국 쓰이지 않게 되거든요. 낱개의 정보 하나하나를 관람객 또는 독자가 읽어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추려낸 정보들이 재구성되어 그려내는 불친절하고 모호한 집합으로서의 이미지가 결국 제가 작업을 통해 공유하고 싶은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기록 과정의 수고로움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어딘가에는 쓰임이 있게 되더라고요.